이 요소는 젊은 세대 사이에 자라나고 있는 태도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태도와는 아주 다른 태도이다. 이 젊은이들에게서 우리는 취득과 소유의 감춰진 형태가 아니며, ‘오래 지속되는’ 것을 그 보상으로 기대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서 진정한 기쁨을 나타내는 소비 패턴을 보게 된다. 이들 젊은이들은 먼 곳까지, 그것도 가끔 고생을 하면서 찾아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보고 싶은 장소를 보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의 목적이 그들이 생각하는 만큼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충분한 진지성, 준비, 혹은 집중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 젊은이들은 과감히 ‘존재하려고 할’ 뿐 보상으로 무엇을 얻느냐, 무엇을 보존할 수 있느냐 하는 데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또 철학적-정치적으로는 가끔 순진한 태도를 보이지만 구세대보다 훨씬 성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시장에서 팔릴 만한 ‘상품’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아를 갈고 닦지는 않는다. 그들은 고의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항상 거짓말을 함으로써 그들의 이미지를 보호하려 하지 않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듯이 진실을 억압하기 위해 정력을 소모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가끔 그들은 그들의 솔직성으로 어른들에게 감명을 준다. 왜냐하면 어른들은 진실을 보거나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은밀히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중에는 여러 가지 색채를 띤 정치적-종교적 지향성을 지닌 집단도 있지만,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교의(敎義)를 갖지 않고 다만 자신에 대해서는 ‘모색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들은 아직 자신이나 실제상황의 지표가 될 목적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갖기 위해서나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묘사 중의 이 긍정적 요소에는 수정을 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젊은이들( 그리고 그들의 수는 60년대말부터 두드러지게 줄고 있다) 대다수는 ‘…로부터의’ 자유에서 ‘…로의’ 자유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들은 다만 반항했을 뿐 억압과 종속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목적 이외에는 그것을 지향하여 나아가야 할 목적을 찾아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부르주아인 그들 부모의 표어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표어는 ‘새로운 것은 아름답다’는 것이었으며, 그들은 가장 뛰어난 정신이 만들어낸 사상을 포함한 모든 전통에 대해 거의 공포스러울 만큼의 무관심을 나타냈다. 그들은 일종의 단순한 자기도취에 빠져 발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그들 스스로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근본적으로 그들의 이상은 다시 어린애가 되는 것이었고, 마르쿠제 같은 저자들이 어린아이로 되돌아가는 것이 — 성년으로의 발전이 아니라 — 사회주의와 혁명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편리한 이데올리기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아직 젊어서 이 도취감이 지속되는 한은 행복했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났을 때 그들 대부분에게 남는 것은 씁슬한 실망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근거 있는 확고한 신념도 얻지 못했으며, 자기의 내부에 중심도 갖지 못했다. 그리하여 흔히 그들은 실망한 무감동한 인간으로 — 혹은 불행한 파괴의 광신자로 — 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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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 추정으로는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의 변화에 진지하게 전념하고 있는 젊은이들(그리고 약간의 어른들)의 수는 여기저기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는 극소수의 인간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아주 많은 집단과 개인이 ‘존재’를 지향하고 나아가고 있음을, 그들이 대다수 사람들의 소유지향을 초월하여 새로운 경향을 대표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들은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 사람들임을 믿고 있다. 소수자가 역사적 발전의 방향을 보여준다는 것은 역사상 최초의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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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변화란 여자에 대한 가부장의 지상권의 붕괴이며,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지배권의 붕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