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법규.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혼돈만이 가득하다. 하지만 전통과 법규에만 의존하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를 옥제는 억압과 경직된 사회를 스스로 자초하는 것과 같다. 그런 사회는 창의적인 발상도 발전도 없는 썩은 고인 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그러한 재앙을 자진해서 맞지 않는 한 그 세계는 처참히 무너질 것이기에 ‘개인적 도덕률’의 쇄신을 허용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는 혼돈을 각 개인이 자발적으로 직면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이다.
혼돈을 자발적으로 직면하는 개개인은 기존의 전통과 법규를 신성시하는 이들에게, 즉 현재 상태에 잘 적응한 이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기존의 틀은 안전하게 느껴지고 새로운 무언가는 위협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가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대조를 이루듯 무엇이 더 이상적인가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안전과 억압 그리고 기회와 위기 속에서 우리는 예수를 닮길 바라며, 영웅을 선망하고 있다.
법규와 자유의 대조는 권위와 협동의 대조를 이루는 것과도 비슷하다.
권위에 의거한 규칙보다 협동에 의거한 규칙을 수립할 때 인간관계의 형평성이 더 만족스럽게 유지된다고 봤다. 강압적인 권위 없이도 규칙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규칙에 동의한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이곳에서 예수의 본보기와 영웅은 혼자 미지를 맞서 이를 헤치는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그 미지를 헤집고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 와야만 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개인의 충동이 없으면 정체된다. 개인의 충동은 공동체의 공감이 없으면 사라진다.
법규와 자유 속, 나는 마치 내가 모든 법규를 지키고 있다는 듯 행동했다. 그 심리 속 나는 자유에 무방비하여도 된다는 듯 행동했다. 그렇지만 가장 안정된 상태는 그 법규와 자유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그 미지의 탐구와 그에 따른 여정, 위기, 가르침은 필수적일 수 있어도, 이는 사람들의 공감대를 사지 못한다면 결국 무의미해진다. 법규는 당신을 지켜줄 공감대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 기반 위에서의 당신의 여정은 해당 문화에서 아직 구체화하지 못 한 의식 단계 또는 그 차원을 넘어서는 기회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법규 속에서 또는 무한한 자유 속에서, 그리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에 살 수 없으며, 그러한 격차와 불평등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비와 희망을 걸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닮길 원하는 것이며, 예수를 우리 자신과 동일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생각한 하늘나라는 이방인뿐 아니라 당시 도덕률의 관점에서도 하잘것없는 죄인으로 취급되던 창녀, 세리, 병자, 정신병자, 적수 등 모든 이를 포용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덕률의 종말이나 모든 것이 똑같아져서 모두 다 가치를 상실한 무질서한 ‘공동체’의 수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는 다만 과거의 이력이나 출신이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그것으로 현재의 가치나 미래의 가능성을 못 받지 않는 나라를 꿈 꿨을 것이다.
전통과 법규를 알아라. 그것은 사회의 틀이다.
자비를 베풀어라. 그것이 선이다.
세상을 여행하라. 그것이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