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는 아름답고 정서적인 표현들이 많이 내포된 책이다. 코스모스 속 우주의 신비함과 인류의 신비함, 역사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은 이러한 표현들을 통해 한 장 한 장 읽어가는 독자의 가슴을 울려 대략 70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조차도 독자로부터 아쉬움을 남게 한다. 칼 세이건은 그토록 방대한 우주를 탐구하며 코스모스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의 삶에 대해 무슨 생각들을 하였을까? 나는 그것이 무척 궁금하다.​

우리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을까? 진화를 위해 슬픔이라는 감정은 필연적이었을까? 분노는 어떻고 어째서 우리는 부와 아름다움을 과시하여 남들보다도 뛰어난 존재로 인식되기를 욕망할까? 1000억 개 은하가 존재하는 이 우주적 공간에서 우리 인간은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자의식이라는 이러한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도록 진화하여 어떻게 그 기원을 궁금해하게 되었을까? 그저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뇌를 진화시켜 자의식을 가지게 되었나? 다시 돌아가 슬픔이라는 감정은 그 진화에 필연적 요소였을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겪는 증오와 사랑, 수고와 분투, 혼돈과 질서. 이 궁금점들이 우주의 진실을 알아가는 것에 대한 나의 두려움을 넘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로 나를 인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두려움이 무색하게도 코스모스는 과학적 사실을 무분별하게 우리에게 폭격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에 대한 궁금점을 더욱 자아내게 하였고 우리의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글은 내가 코스모스를 읽으며 특별히 좀 더 관심 있게 읽었던 부분들을 공유하고 남기고자 적는다.


[7장: 밤하늘의 등뼈 중]

​별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아기의 웃음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류는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살아왔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대의 아주 특별한 점은 이 질문에 우리가 어느 정도 그럴듯한 답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책과 도서관은 이러한 질문의 답이 무엇인지 밝혀 주는 수단이다. 생물학에는 반복설이라는 것이 있다. 이 가설은 모든 상황에 100퍼센트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생물의 발생 과정에 관해서는 비교적 잘 들어맞는다. 반복설의 핵심 내용은 개체 하나의 발생 과정이 해당 종이 겪어 온 진화의 전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나는 개개인의 지적 성숙 과정에서도 반복설이 성립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조상들이 해 온 사고의 과정들을 되풀이하면서 하나의 개인으로 성장해 간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던지는 질문들. 예로 어떠한 인생이 행복한 삶인가, 어떠한 인생이 가치 있는 삶인가? 우리는 어떠한 존재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왜 이런 생각들을 하는가? 왜 노력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인류가 자의식을 가지고서부터 항상 던져오던 질문들이 아닐까 싶다. 현재 우리의 세계는 그 과거에 비해 많이 다르지만 우리 인간 본연은 크게 다르지 않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각자 나름의 답을 찾아가려 노력한다. 그리고 나는 현재 많은 이들이 이를 관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적 수고와 노력은 그저 살아가면서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그저 사는 대로 사는 것은 인생을 잘 사는 방법이 아니며 가축 같은 삶을 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제3자가 되어 자기 자신의 사태와 처지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이 능력을 어떻게 잘 활용할 수 있느냐가 인간으로서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즉 철학적 수고와 노력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공부하듯 수고를 들여야 하는 것이지 않냐는 것이다. 나 또한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답하려 애쓰는 것은 그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일 터이다.

[11장: 미래로 띄운 편지 중]

폴 맥린이 지극히 도발적인 학설을 하나 제시한 적이 있다. 그는 뇌의 고차원적인 기능들이 크게 세 단계에 걸쳐 진화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R-영역, 변연계, 대뇌 피질의 세 단계이다. 뇌간의 상단부를 모자처럼 뒤덮고 있는 부위를 R-영역이라 부르는데, 이 R-영역이 인간의 공격적 행위, 정형화된 의식 행위, 자기 세력권의 방어, 계층적 위계질서의 유지 등을 관장한다. 뇌의 이 부위는 수억 년 전 인간이 아직 파충류였던 시기에 발달했다. 우리 각자의 두개골 내부 깊숙한 곳에는 말하자면 악어의 두뇌가 아직 남아 있는 셈이다. R-영역은 변연계가 둘러싸고 있는데 바로 이 부위가 포유류 시기에 생긴 뇌이다. 이 변연계는 수천만 년 전 인간이 포유류이고 아직 영장류가 되기 이전 시기에 발달한 부위이다. 뇌의 이 부위가 인간의 기분, 감정, 걱정 등의 정서적 반응과 행동 그리고 자녀 보호의 본능을 지시하고 제어한다. 끝으로 뇌의 가장 바깥 부분인 대뇌 피질을 살펴보자. 대뇌 피질은 지금으로부터 수백만 년 전 인간이 영장류였던 시기에 생긴 부위로서, 자기 밑에 아직도 버티고 있는 원시 두뇌와 늘 편치 않은 휴전의 관계를 유지하며 지낸다. 대뇌 피질에서 물질이 의식을 창출하므로 대뇌 피질이야말로 인류가 꿈꾸는 모든 우주여행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두뇌 전체 질량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대뇌 피질이 직관과 비판적 분선의 중추이다. 아이디어의 창출과 영감의 발현이 바로 여기 대뇌 피질에서 이루어진다. 이곳에서 읽기와 쓰기, 수학적 추론과 작곡이 이루어진다. 인간으로 하여금 의식적 삶을 기능케 하는 부위가 다름 아닌 대뇌 피질인 것이다. 인류와 다른 종의 차별화가 대뇌 피질에서 비롯되며, 인간의 인간다움은 바로 이 대뇌 피질 때문에 가능하다. 한마디로 문명은 대뇌 피질의 산물이다. 뇌의 언어는 유전자 DNA의 언어와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모두 신경원 또는 뉴런이라고 불리는 세포 속에 암호로 씌어있다. 뉴런은 굵기가 겨우 수백 분의 1밀리미터인 현미경적 존재로서 아주 미세한 전기, 화학적 스위치 회로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 뉴런이 우리 몸속에 약 1000억 개 있다. 은하수 은하에도 대략 이 정도 수의 별들이 존재한다. 뉴런들 중에는 하나가 수천 개의 이웃 뉴런 세포들과 연결된 것들이 있다. 인간 대뇌 피질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연결을 총 10^14개가량 볼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유전자가 제공하는 것 이상의 정보를 미루어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두뇌 도서관의 규모가 유전자 도서관의 수만 배나 되는 것이다. 겨우 걸음마를 뗄 줄 아는 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해 보라. 사람의 알고자 하는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배우려는 열망이야말로 생존을 위한 도구이다. 인간의 감정이나 인간 행동의 관습적 유형은 마음 어딘가 깊숙한 곳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인간 본성의 일부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특성을 인간만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동물들도 감정을 표출한다. 하나의 종으로 인간을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다. 대뇌 피질이 사람을 동물적 인간에서 해방시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주인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비나 도마뱀의 유전적 행동 양식에 더 이상 묶여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자신이 뇌 속에 집어넣은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각자는 한 사람의 성숙한 인격체로서 누구를 아끼며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하지, 파충류 수준의 두뇌가 명령하는 대로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숙한 인격체로서 누구를 아끼며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이것은 인격체로서의 행운이요 불행이다. 우리는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정은 어떻게 가지게 되었나? 아마도 기쁨은 삶을 활력 있게 삶으로써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슬픔은 연민을 통해 연대를 이루고 무리를 짓고 남을 위해 희생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감정이 아닐까? 죽음과 삶의 탄생은 필연적이어야 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 진화를 통해 얻어낸 것이 자의식이고 감정이라면, 이러한 감정 또한 우리가 짊어가야 할 책임이고 의무일 것이다. 이를 넘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뒤돌아 볼 자의식과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어떤 도시를 먼 미래를 내다보고 만든 설계에 근거하여 차근차근 만들어 갔다면, 그 도시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조화를 이루며 성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필요가 있을 때마다 여기 조금 바꾸고 저기 찔끔 확장하는 식으로 도시를 가꾸어 왔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 대도시들의 속 사정을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뒤죽박죽의 상태이다. 그런데 사람의 두뇌도 도시와 비슷하게 성장해 왔다. 도시건 두뇌건 양쪽 모두 처음에는 작은 중심부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커졌다. 진화가 진행되는 동안 먼저 생긴 부분들은 그대로 남아서 그들 나름의 기능을 계속 수행해 왔다. 진화의 과정에서는 두뇌 안쪽의 오래된 부분을 모두 제거하고 좀 더 좋은 새 기능의 뇌로 그 부분을 완전히 대치할 수는 없다. 집을 수리하는 동안에는 낡은 집의 기존 기능이 계속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뇌간을 R-영역이 둘러싸고 그 위를 변연계가 덮고, 그리고 가장 바깥에 대뇌 피질이 자리하게 되었다. 기존 부품들이 비록 오래되기는 했지만 생명 현상의 근본을 좌우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들의 기능을 잠시 멈추고 통째로 갈아치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성능이 많이 떨어지고 때로 비생산적인 일을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낡은 부품들이 숨을 헐떡이면서 자신의 기능을 계속 발휘하게 두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진화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인 것이다.

​우리가 살인 현장을 보며 “야만적이다”, “끔찍하다”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 자신의 낡은 부품을 보며 한탄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뇌 속 R-영역과 대뇌 피질의 대립 속 선택을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 대립 속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데 수많은 유혹에 붙히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증오 속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능력이 있고, 우리는 슬픔 속 스스로를 구제할 능력이 있으며, 우리는 흥분 속 스스로를 내려앉힐 능력이 있다. 이것이 오래된 부품 속 우리 자신과 우리의 탄생에 기여한 감정과에 대립인 것이다.


[13장: 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까? 중]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 가해질 때, 자신의 생존이 도전을 받게 될 때 인간의 - 적어도 일부 사람들의 - 분노는 사람을 살인의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하는 경향이 있다. 같은 종류의 위협이 국가들에 가해질 때, 국가도 걷잡을 수 없는 살인적 분노에 휘말린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우리의 열정과 좀 더 바람직한 인간 본성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볼 수 있다.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의 격렬한 분노는 아주 먼 옛날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져서 아직도 우리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파충류의 뇌, 소위 뇌의 R-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한편 감정의 중재와 기억의 관장은 진화의 가장 최근 단계에서 발달한 포유류와 인간의 뇌, 즉 변연계와 대뇌 피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앞에서 이야기한 갈등은 파충류와 포유류의 뇌가 벌이는 대립의 소산인 셈이다.

​원숭이의 대리모. 새끼 원숭이가 좋아할 가짜 엄마는 어느 쪽일까? 하나는 우유병이 매달린 철사 구조물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천으로 감싸 옷을 입힌 것이다. 애기 원숭이는 주저 없이 후자에게로 달려갔다. 타자와의 교류, 육체 접촉, 따듯함 등에 대한 욕구는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유전적으로 습득된 인간과 영장류의 공통 속성이다.

​포유동물들은 서로 코를 비비고 끌어안고 애무하고 입을 맞추고 얼싸안고 서로 쓰다듬으며 자식을 사랑하는 등의 특별한 행동 양식을 보인다. 그런데 파충류에게서는 이런 행동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 머릿속에서 R-영역과 변연계가 휴전 상태의 불안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아직도 종종 태곳적 범죄 행위를 저지르고는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포유동물의 어미와 새끼의 관계를 보자. 어미가 새끼에게 보이는 애정 표현은 포유동물의 본성을 자극하여 변연계의 활동을 도울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접촉을 통한 애정 표현이 결여된 상황에서는 파충류의 행동 양식이 권장될 것이다. 이러한 추리를 가능케 하는 증거가 있다. 해리 할로와 마거리 할로 부부가 수행한 원숭이 실험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동료 원숭이를 바라볼 수 있고 그들의 냄새와 소리도 맡고 들을 수 있지만, 피부 접촉은 금지된 우리에 가둬 키운 원숭이들은 우울하고 자폐적이며 자기 파괴적 성향을 보였으며 여러 가지 비정상적 행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로 보호 시설에서 육체적 접촉 없이 자란 어린이들에게서도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성향의 행동을 볼 수 있다. 피부 접촉의 단절에서 겪게 되는 애정 결핍은 사람에게 깊은 고통을 안겨 준다.

​신경심리학자 제임스 프레스콧이 산업화 이전 단계에 있는 400여 개의 사회를 선정하여 그 문화들을 상호 비교하는 통계 분석 연구를 수행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유아기에 피부 접촉을 통한 애정 표현이 발달된 문화일수록 폭력을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피부 접촉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 자란 어린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성생활이 크게 제약받지 않는 사회에서는 이들 역시 성인이 됐을 때 폭력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레스콧의 주장에 따르면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사회들은 주로 육체적 괘락을 박탈당한 사람들로 구성된다고 한다.

인간 행위에 대한 오늘날의 이해는 피부 접촉이 많고 적음이 어떻게 폭력성의 발현과 그런 상관관계를 갖게 됐는지 아직 속 시원하게 설명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프레스콧의 연구 결과는 둘 사이에 뚜렷한 상관관계가 존재함을 증언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유아기에 피부 접촉이 빈번하고 결혼 전에 성관계가 인정되는 사회가 폭력 성향의 사회가 될 상대 빈도는 2퍼센트이다. 이러한 빈도의 발생이 우연의 소산일 확률은 1:125,000이다. 나는 아직 이와 같이 정확한 예측을 가능케 하는 표현 변수를 본 적이 없다.” 사람은 어렸을 때에는 피부 접촉에 목말라하고 다 자라서는 성적 접촉을 갈망하게 마련인 모양이다. 아이들이 그렇게 목말라하는 피부 접촉을 누리면서 자랄 수 있다면, 그들은 공격성, 지역성, 지나친 의식행위, 사회 계층 간의 갈등 등에서 초래되는 인간의 야만성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도 자라는 과정에서 앞에서 열거한 야만성을 경험하게 되겠지만, 그들이 이룩하는 사회는 파충류의 두뇌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프레스콧의 연구 결과가 옳다면 핵무기와 피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연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어린이 학대, 성생활의 심한 억압 등은 인류의 평화를 해치는 죄악이다. 인류의 미래에 공헌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의 아이를 자주 껴안아 주라.

​우리는 현재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 본연 자신과 우리 후손들의 의무와 책임일 것이다.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가? 자신의 아이를 자주 껴안아 주라. 그들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돕고 자기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그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낼 수 있도록 돕고 수많은 유혹들을 떨쳐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류도 더 큰 집단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과 가까운 가족에게, 다음에는 사냥과 채집 활동을 자기와 같이 하는 이들에게만 충성을 바치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충성의 대상을 자기가 속한 마을에서, 부족으로, 그리고 도시 국가에서, 국가의 순으로 점차 넓혀 갔다. 사랑할 대상의 범주를 계속해서 넓혀 왔다는 이야기이다. 충성의 대상은 오늘날 초강대국이라 불리는 조직으로까지 확대됐다. 총 강대국은 문화와 인종적 배경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어느 정도 함께 노력할 수 있는 사회이다.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인간화의 과정과 인격 함양을 경험하게 된다. 현대는 충성의 대상을 인류 전체와 지구 전체로 확대해야 할 시대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의 생물종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설명한 우리 생각을 싫어하는 자들이 통치하는 나라도 지구상에는 많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를 배반자, 충성심이 없는 비애국자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이야기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옮긴이 후기 중]

​저는 꿈, 사유의 지평, 우주와 인간의 관계 등 그가 제시하는 몇 마디 키워드에 그만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우주인이 달나라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현대 과학과 공학의 눈부신 발달 때문만은 아니라고 늘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달을 두고 노래한 시인들이 더 중요하고 큰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우리네 삶에서 소망 없이 이루어진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시인이 우리 가슴에 심어 준 꿈의 위력이 과학자들로 하여금 달나라 여행을 설계하게 했을 것입니다.

​철학과 시인의 위대함은 기리 기역 되고 이어져야 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를 가르치고 우리 스스로 고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 소망 없이 이루어진 일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왜 노력 해야하는가? 이는 우리 조상들이 수없이 던져내놓은 질문이고 우리는 그 지혜를 이어 받았다. 이를 고맙게 여기고 그 중요성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